그 공포에 대한 의문..
언제나 나는 거의 대부분을 내 마음 가는대로 사는 걸 원칙으로 삼고 즐긴다.
내 위주로 옆의 사람이 불편을 느끼지 않게,그리고 너무 요란스럽지는 않도록 하는 건 또 다른 하나의 원칙이고...
그러나 내가 지금 무엇을 가장 원하고 있으며 내 마음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에 무게를 두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떠밀려 해 나가는 시간 보다는, 그래서 짜증이 나고 그로 인해 속 앓이를 하는 것 보다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면 자발적으로 기꺼이 마음을 바꾸고 즐기며 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흔히 듣는 얘기가 있다---"하고 싶은대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라든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어떻게 살아.." 라는..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하고 싶은대로 한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야 하는 걸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라든지,'원하지 않는 걸 꼭 해야만 하는 다른 목적이 없든지 그 어떤 목적을 포기할 수 있다면 왜 그게 안돼?..' 라는..
그렇게 함으로 잃는 어떤 부분들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자유로울 수도 있지 않을가 싶다만...그리고 사실 잃는 것 보다는 얻는 게 더 많다..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손해와 득을 염두에 두지 않느다..그럼으로써 손해를 본다면 봐야하고 득이 있다면 얻으면 되는 것.
암튼 될 수 있으면 옆 사람은 불편하지 않도록 노력은 하지만 옆의 사람들로 인하여 내 마음이 원하는 걸 피해 가지는 않는다.
예컨데, 누가 나를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나쁘게 말 할가 봐 겁나서..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서..아니면 누군가의 기준에 부합되도록 행동할 수 있음을 보일려고..또는 어느 선까지는 내 이미지를 레벨 업 하기 위해서..더구나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싶어서...내 어떤 이익을 위해서...어떤 목적으로나 나는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느데 누군가 기어히 나로 하여금 몰고 가도록 내버려 두면서 전혀 나 아닌 나로 꾸미는 것 따위로 내 마음을 불편하게 살고 싶지는 않는거다.그런 면에서는 위선 보다는 오히려 위악 쪽이 더욱 친밀하게 느껴지고 정이 간다고나 할가...어떤 상황에서 굳이 그것이 필요 하다면 내 마음을 바꾸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바꿔서 함께 따라 나사겠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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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적이고 규칙적인 모임일수록 사람들은 ,처음의 취지와는 달리,그 중 많은 시간들을 남에 대한 가십이나 인성에 대한 불만이나 행동에 대한 불편함들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들 한다.
사실 남의 근황이나 말들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재미를 줄 수도 있고 겉보기에는 좋은 사람의 안 좋은 어떤 뒷모습을 듣고 보는 것 같은 대리 만족(?)을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고.... 해서 마주 짝짜꿍이 되어 수다 삼매에 빠지지 않으면 몹시 분위기가 어색해 질 때도 많다.
그러나 많은 부분 그것도 몹시 피곤한 일들 중의 하나가 되고..
누군가 나에 대해 많은 부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가지 위로나 조언을 하려하고 완전히 내 편에 서서 나 대신 해명 아닌 해명을 해주고 도움을 줄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참 피곤할 때도 있고..
나 역시 어쩌다 내 의도와 다르게 다른 사람을 내 식으로 예단하는 걸로 본의 아니게 남의 인격을 훼손하는 경우도 뒤늦게 정말 마음이 불편해 질 때도 있고..
모두가 다른 사람끼리 모여 사는 세상인데 모두가 나를 이해하고 좋아하도록 바라지는 않을 것이고 그 하나 하나에게 내가 그렇게 하고 사는 생각이나 행동들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들도 참 귀찮고 피곤한 것들이다.
호의에서 비롯된 넘치면서 겉도는 친절이나 반대의 악의적인 오해---둘다는 참으로 난감한 일 중 하나다.일일이 다 입장을 얘기하고 해명하는 건 더욱 난감한 짓이다..차라리 침묵이 편할 때가 많고..사실은 그런 모든 더불어 사는 불편함들이 조금은 귀찮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냥 그건 <너>니까 그러려니 받아 들이며 말 없이 함께 동행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내가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함이다.
이 모든 피곤함과 불편함이 싫어서 어느 날 부터 모든 인위적으로 맺어진 모임에서 벗어났다.
군더더기가 덧칠해지지 않은,화장하지 않아도 좋은 그냥 나 자신이고 싶어서.그리고 비껴서고 싶은 마음에서...아니,가장 솔직히 말하면 귀찮아서다,,.내키지도 않는데 함께 어울리고 시간 보내고 희희낙낙해야 하는 게 내겐 참 힘들고 귀찮은 일인 것이다...더러는 그게 사회생활이라고 하는데...근데 그게 사회생활은 아니지..모임이라는 것이 사실은 참 웃기는 거다..누구나 필요하거나 보고 싶거나 사랑하면 모임 같은 거 없더라도 마음이 가면 다 만나게 되어 있는 거 아닌가..규칙적이지 않고 진부하지도 않고 오며 가며 안부가 궁금해지고 보고 싶어지는 사람끼리의 만남을 내가 즐겨 자발적으로 주도도 하고 노닥대길 즐겨 하는 걸 보면 내가 사회성이 결여되었다고 생각은 않는다...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그리고 갇히지 않길 원할 뿐이지 세상의 일들도 사랑하고 즐긴다.그 일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내 마음이 원하면 정말이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나는 그 일에 파묻히며 열심히 하고 사랑하고 즐긴다.옛날엔 그렇지도 않은 거 같은데 나이따라 완전 몸치로 변한 내가 집 안에서 혼자 가끔 춤 추길 즐기듯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편안한지...이런 나를 두고 더러는 별종이라 이름 붙인다마는 어차피 인생은 주관적이고 어떤 객관적인 법칙이나 잣대가 있을 수 없으니..문제는 그 모든 원하지 않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근본적인 미숙일 수도 있는 문제지만 싫은 걸 억지로 싫지 않은 것 처럼 꾸미는 능력도 없음을 어찌 하겠는가...무엇보다 혼자 있음이 그리 외롭거나 불편하지 않으니..그리고 또 무엇보다 불편을 택하기 보다는 차라리 외로움을 택하고 싶은 내 근본적인 게으름이다.
나이들어 한 가지 늘어난 점이 있다면---좋고 싫음에 대한 표현을 하지 않아도 찝찝하지 않고 이것 저것 따지지 않아도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인데 참 고마운 현상이다..
참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 왔지만 머리 나뿐 나는 얼마가지 않아 금방 그 힘듦을 까먹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만다...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 성격과 습관 덕분에 또 늘 주변 관계에서도 무심하게, 마음과 달리 관심이나 호의를 표현하지 못하고 덤덤히 넘어가고 살아가는 편이다..세심한 부분에서 하나하나 챙기지 못한다는 소리다..
언제나 정을 내고, 준 것 만큼 받아야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나의 그런 태도가 때론 몹시 불만으로 나타나고 나 역시 꼭 되돌려 받길 원하는 정은 조금은 부담이 되곤 한다. 제 때에 맞춰 잘 챙기지 못하는 무심한 성격이라서..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 맘 가는대로 정을 내고 그 담은 금방 내가 상대에게 한 일을 까먹고 만다.
나에 대한 남의, 그들 나름의 선입견으로 나쁘게 각인된 편견이나 말에 마음쓰지 않고 금방 까 먹고 말듯이...그런 면에서는 참 머리가 나쁘다고 할가??..아님 의도적인 마인드 컨트롤인지도..
당연히 그런 다음에 그 되돌아 오는 정에 대해서는 언제나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이 되고..나는 그게 참 좋다.늘 새롭고 고마우니까....
그냥 무심히 나의 무심까지도 넘어가 주는 그런 관계 안에서 살면서 서로 도움이 필요할 때도 무심으로.....많은 말이나 높은 소리로 생색내지 않으며 한 듯 만 듯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이라면 얼마나 좋을가 싶다면 내 욕심일가??
그 뒤는 언제나 신선한 감동이 따를 수도 있지 않을가...그렇다면 그건 인생에서 덤으로 주어지는 줄거움일 거 같은데...
인생을 즐기고 살려면 모든 순간을 자기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방관자가 되어 보는 것도 무심히 객관적이 되어 질 수 있는한 방법인 거 같다.
그리고 참 많은 시간을---특히 몹시 힘들 때는 더욱---내 곁에서 나를 바라보며 그 중심에서 벗어나곤 했다.
그러면 가끔은,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 또한 즐길 수도 있게 된다..
나는 여러번을 그렇게 힘들지 않게 너무나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뒤돌아 보면 참 아름다운 자화상이 보인다.
이건 완전 나르시즘의 수준이지만 언제나 참 잘도 살았단 생각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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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엄습한 대상 없는 공포---나는 지금도 그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도대체 그 대상이 무엇이었을가를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오는 게 참 이상하다.
나는 옛날 부터 죽음의 관념을 생각하면 파란 잔듸를 연상했었다.아주 부드럽고 편안한..
그래서 늘 자신있게(?)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죽음, 그 자체가 두렵다거나 아님 이 좋은 세상을 기어히 오래 살아 누려야 한다는 생각은 없는데...그리고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또다시 흘러가 버림을 익히 알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그때 그때 나름의 최선으로 살고자 노력하고 되어가는대로, 운명과도 같은 한계에 순종하며 너무나 순하게도 그 결론을 수용하며 살았는데..
이만큼 멀리 와서 뒤돌아 보면 더 좋은 길도 보이지만 적어도 그 땐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그리고 그 땐 나름의 최선을 선택했으니 회환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음이다.
그럼에도... 무엇일가..그 공포는...?
오직 어둠만이 느껴진 공포----그건 대상을 가진 두려움과는 또 다른 것이었는데...
깍아지른 절벽에 서서 밑이 보이지 않는 캄캄함을 바라봐야 하는 공포..
뛰어 넘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보고 싶지 않으니 호기심도 없이 보지 않고 뛰어 넘었을 것이다....그리고 뒤돌아 보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아니었다...나는 그걸 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방관자도 될 수 없었다.전혀 예습하지 못한 죽음이란 게 바로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공포에 파묻혀 나를 잃어 버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나는 그 느낌의 와중에서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순서를 정해 놓고 차근차근 해 나가고 있었으니까..그리고 감히 말하건데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니까...평소의 내 일상을 살았으니까...밥도 잘 먹고 잠도 무지 잘 자고 일도 했으니까...그리고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았고 그리고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정직 했으니까..
근데 뭐지??...
그 때 느낀 그 캄캄한 공포의 느낌은???
친구 일선이의 말대로 내 존재의 근원을 정면으로 만남에서 생기는 공포였을가?
아님 만나야 하는데 만나지지 않는데 대한 캄캄한 공포였을가??
어쨋든 전혀 나답지 못한 공포였다....하긴 나답다는 게 무엇일가...저 위에 나열한 모든 특징들이 평소의 나인데 답지 않았다는 소리일 뿐이고 이제 그 나라는 의미도 헷갈리고 있다.<나답다>는 말로 정의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그러면서 오늘도 나를 살고 있다..
그 때 느낀 공포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면서..다시 찾아오기 그 전에 그 공포의 대상이 무언지를 알아내고 어떤 식으로든지 극복의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그래야만 온전히 평화로워 질 수 있을 것 같다..그 평화란 사람들이 말하는 그저 조용하기만 하는, 보여지는 평화가 아니라 내면의 빛과 믿음에서 올라오는 평화로움일 것이다...그 무엇에도 두렵거나 흔들리지 않는...보여지는 모습이 조금 출렁거릴지라도 무게중심이 확실한 그런 평화를 원함인데 그 때의 그 공포는 전혀 아니었다..오히려 반대로, 보여지는 모습은 조용하고 담담하였지만 내 내면의 소용돌이는 이제껏 가져보지 못한 것이었다..뭐지?
친구의 심리학자다운 말에 의하면---
지난 날 내게 발생한 traumatic한 일들이 나의 무의식의 신경을 건들여서 평소엔 내 성격에 묻혀 나타나지 않았으나 극한의 상황이란 생각이 들면서 무의식이 표현하는 더 크게 나타나는 공포 현상이라고 하는데...그리고 부딪혀 깨부셔 보라고 하는데...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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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믿는 하느님은..
내 앞에서 앞장서서 나를 좋은 쪽으로만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고 늘 나의 뒤의 어느 그늘에서 내가 저질러 놓은 일들이나 나뿌게 결론난 일들에 대한 수습을 해주시며 그 어떤 방법으로 나를 일깨워 다시 바른 길을 찾도록 유도해 주시는 분이셨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내 뒤에서 보이지 않게 함께 계시는 그 분을 믿고 따랐고 든든하게 앞장 설 수 있었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가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리를 두고 따라오며 보호하고 있는 엄마를 믿고 놀이터에서 안심하고 마음껏 뛰노는 그런 맘이 아닐가..
현명한 부모는 자식의 일을 대신 해주는 부모가 아니고 곁에서 보호하며 이끌어 가르치는 부모인 것처럼..
내가 느끼는 나의 하느님은 그랬다..
나는 나의 그런 하느님을.. 언제나 차곡 차곡 접어 한 주먹되게 만들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런 내 손녀들을 보며 내 안에서 발견하곤 하고 나의 하느님도 나를 향해 이런 감정을 가지리라 생각하며 가슴저린 통증과도 흡사한 아픔을 가졌었다...눈물이 쑥 빠지게 호되게 야단을 칠 때도, 아무리 하기 싫더리도 제일을 스스로 하도록 힘들게 시키고, 아무리 매달려 칭얼대도 안되는 건 절대 안됨을 가르치고....
그러면서도 애타게, 언제나 니 곁에서, 니가 알든 모르든 너의 어려움을 대신해 주고 싶단 염원으로 사랑 하는 마음---손녀를 향한 나의 그 마음 안에서 나는 나에 대한 나의 하느님을 느꼈다.
공포 앞에서 사라지고 만 내 이 믿음의 실체는?---아무 것도 아니었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