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미학
뇌졸증으로 왼 쪽 팔과 다리가 불편한 여자가 있다.
위로 가기도, 아래로 가기도 어중간한 우리들의 나이에다 남편 친구의 부인이다.
나름의 영리함과 순발력으로 큰 지식이나 배움은 없으나 같이 이야기 하며 시간을 보내면 그리 지루하지 않게 함께 할 수 있는 여자다.
"몸은 이렇게 불편해도 마음은 그 이전 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어느 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냐..고 묻는 내 물음에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너무 커졌기 때문.." 이라는 대답.
나는 늘 <고통은 또 다른 얼굴의 축복이다> 라는 체험과 믿음을 갖고 있는데 딱히 설명이 되지 않아 찝찝했고 누군가에게 설명을 하고 싶어질 때면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었다.뜻을 전달할 능력 없음에..
그런데...그 여자의 말에 찰라적인 빛이 보였다..
그래...맞다...
고통이 축복인 이유가 말로 설명이 되어질려고 한다.
고통과 맞닥뜨리면 일단은 내가 낮아진다.
내가 낮아지는 만큼 사물에 대한 눈 높이가 낮아지는 건 또 당연한 거고..
그리고는 마음이 열리게 된다...어쩔 수 없이..
마음이 열리면 통하고, 비어지게 되고 비어지는 그 공간에 다른 현상이 자리하게 된다.
많은 다른 현상들이 자리하게 되면 또 그 만큼 내(我)가 없어질 수 있는 거다.
내가 없어지는 만큼 자유롭게 되고 그 이후 나타나는 모든 현상에 감사하게 되는 거다.
내 힘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알게 되고 섭리에 눈이 뜨여지고 가슴으로 느낄 때 갖는 희열을 체험 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은...'니가 무언가를 잃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우니까 그렇게 밖에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무언의 반응을 표하기도 한다...
그렇게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상황과 처지를 자기의 잣대로 預端(예단)하고, 자기식으로 위로 하려는 사람을 만나면 고통의 역설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지지만 그런 사람과 마주하면 참 답답하고 슬퍼진다...
이미 바라보고 느끼는 시각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소통이 안되고 말을 하면 할수록 답답해진다.
대부분 그런류의 사람들은 축복을 재물과 명예의 축적으로 생각하고 고통은 그 반대로 나타나는 형태의 개념으로 보니까 나를 비우고 다스리는 기회로 부여된 고통을 함께, 동질의 무게만큼 이해할 수는 없는 거다.
그래서 그 여자---반 편이 불편해진 그 여자와 얘기하면 즐겁고 편해지는지도 모르겠다.
반신불수의 자기 병이 자기를 얼마나 행복한 마음이 들게 만든지 모른다는 그 역설에 속속들이 개운함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늘 '나쁘게 나타는 모든 것이 오직 나쁘지만은 않다'라는 걸 이미 알고 있고
비단 길만을 걸어 온 사람들의 마음이 다 걸어 온 비단 길처럼 부드럽고 매끄럽지만은 않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고통은 감사함과 행복을 알 수 있는 감정의 지름길을 가르쳐 준다는 역설에 감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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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늙을 수 있음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한 건지에 대해서도 미소를 머금고 감탄할 때가 많다.
나는 진실로 한 번도 늙는다는 것에 비참함을 가지지 않았다.
그냥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아파진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퍼 질 때도 있겠지만 그 당연함에 이의 제기만 하지 않고 친구처럼 받아 들인다면 무엇이 문젠가..
가끔은 오히려 느긋하게 즐길 수도 있을 거 같다.
조금 느리고 실수도 하면서, 버릇없는(?) 젊은 아이들에게 실소를 선물해도 좀 그러면 어떠냐...그러니까 늙은 거지.
너희 젊음의 어이없음과 실수를 아름답게 보아 넘기는 여유도 내게는 있는데..
너희가 나의 늙음을 없수이 여기면 안되는 거지만 어쩌랴 그들은 그 자체도 모르는데..
늙음이 젊음처럼 특권이 될 수는 없지만 부끄럽게나 감추고 싶은 문제도 절대 아니다.
젊음이 특권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늙은 나만큼 인생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봐 주는 거지 특권 그 자체는 아니다.
물에 잠겼다 나온 스폰지에서 물이 흘러 내리듯 내 안의 지혜를 전부 젊은 너희들에게 흘리고 앙상해졌지만 내 안에는 젊은 것들이 알 수 없는 심연이 있다...이건 웃거나 말거나 엄청난 자부심이다.가져도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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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어떤 신부님에게서 <황혼의 미학>이란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나는 공부는 못하면서 책을 읽을 때는 언제나 무슨 논문 준비라도 하듯이 밑 줄 그어 음미해 가며 읽는 버릇이다. ㅎ..
거기에 쓰여 있는 말 중---'잘 늙은 사람은 무엇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삶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 ' 고..
그리고 자기를 내려 놓으면 흐르는 물처럼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다고도 했다.
자기를 내려 놓을 수 있어야 마음이 가난해 질 수 있다고도 했다.
많은 富를 가져도 마음이 가난해지지 못하면 가진만큼 무거울 뿐이라고도 했다.
암튼 지금 우리들의 나이에 신부님이 선물한 그 책---
안셀롬 그륀이라는 사람이 지은 <황혼의 미학>은 꼭 읽어도 좋을 책이기에 기어히 추천하고 싶고.
우리들의 대화가 텅 빈 말의 잔치는 안되길 바라며...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