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태생적인 외로움--너를 대신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
지금이 성당에서 말하는 <사순>의 시기이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의 시기이다.
나는 늘 이 시기면 성모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눈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 아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음을...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순종하고,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신앙의 규범이라고 성당에서는 가르친다.
결코 <왜??..>라고 하늘을 향해 묻고 통곡하지 않는다..
얼마나 쓸쓸하고 외롭고 슬픈 일이냐....
내가 너를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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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는 내가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음에 당황하고 처참했다.
그리고 통곡도,눈물도 나오지 않아 가슴으로만 먹먹하게 울었다.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니...
내가 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니..
그 나이 되도록 씻기고 닦이고 먹여 줬는데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니..
더구나 그 애가 그렇게 되는 사이에 나는 남편과 삽겹살 구이를 먹고 있었다니..
이게 다 말이 되는 소리냐???...
점심을 먹고 "엄마도 커피 한 잔 하세요..지금 나 커피 타임.."이라는 목소리를 전화선을 타고 들은 게 그와의 끝이라니...
아침에 나갈 때 내가 돌려 세우고는 "야..너 꼭 고시 패스 한 놈 같이 범생으로 보인다.." 라는 농담이 얼굴을 마주한 끝이라니..평소 공부를 지독히도 못한 놈 한테 내가 던질 수 있는 여유있는 농담이고 야유(?)였다.
침상에 누인 그에게 엄마인 내가,내가 그를 낳은 엄마인데,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귓소리로 "미안해...미안해..정말이지 너무 미안해.."라는 말의 되풀이와 "니가 사는 그 짦은 시간 안에서.. 행복 했었니??.." 라는 질문이 고작이었다.
행복해 할 시간이라도 있었겠냐마는 더러 친구들이랑 싸구려 캠핑도 가고 아파트 노동자 아르바이트도 한 녀석이라 내가 모르는 즐거움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며 억지로 던진 말이다.
행여 내가 공부,너의 장래라는 이유로 너를 괴롭히고 너의 행복을 방해하지나 않았는지..너무 미안하다.
유난히 갈비찜을 좋아 했었는데....
고 3때 지만 멕일려고 갈비찜을 한 냄비 해놓고 외출하고 온 사이 큰 아들 녀석이 친구랑 와서 다 먹어 치우고는 뼈만 식탁 위에 모아 둔 걸 보고 무지 화를 냈었지..
다 같은 아들이었는데, 편애도 하지 않았는데 그 때는 그렇게 속이 상했다.
해숙이 보증 때문에 집이 경매로 넘어 갈 때 거의 일 주일을 일이 끝 난 밤을 도와 저랑 나랑 자잘한 짐들을 챙겨 이사 갈 집으로 날르고 정리 했었지.
비싼 이삿짐 센타를 이용하지 않고 용달차 하나를 빌려 가구나 전기 제품만 옮길려는 계산으로 내 차의 뒷 좌석과 트렁크로 매일 짐을 챙겨 날랐었지..지랑 나랑 둘이서.
엄마가 감이라는 감은 종류를 막론하고 단감이든 홍시든 말랭이든 다 좋아 하는 걸 알고 생일이면 여자 친구를 통해 한 소쿠리 감을 선물하던 녀석이다.
(아 참 그 애는 잘 있는지..시집은 갔는지...)
엄마 제삿상에는 감 한 접시와 갈비찜과 커피 한 잔만 올리겠다고 농담도 잘 하던 놈이다.
그랬다..세 아들 중에 엄마랑 가장 코드가 잘 맞고 의기투합해서 쇼핑도 같이 잘 다니던 녀석이다.
성경 속에서 죄 없이 고통 받았던 의인 <욥>의 이야기도 여러 번 읽었다.
박완서 씨의 죽은 아들을 기억하는 수필도 읽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내 아들을 데려 간 답은 없었다.
<왜??..>라는 질문은 답이 없을수록 더욱 많아지고 허공에서 맴돌다 가슴에 꽂히는 비수로 돌아 온다.
그 이후로 나는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답이 찾아지는 논리적인 질문 외에 <왜?.> 라는 질문은 하지 않게 되었다.
검사 결과 암이라는 진단을 의사가 나에게 차마 못하고 남편을 일부러 불러서 알려 줬을 때의 그 어지러움 속에서도 나는 결코 <왜?.>라고 묻지 않았다.
의사의 말이---
보통은 암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네 번의 단계적인 순서를 거쳐 마음을 정리 한다고 한다.
그 첫 번 째가 '왜?..왜 나입니까?..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라며 항의하고 받아 들이지 않으며 발버둥 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 없음과 돌아오는 메아리가 더 크게 가슴을 후벼파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래 그렇구나.. 내겐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암이란 친구가 나를 찾았구나..할 수 없지..최악의 경우엔 죽겠지..그러나 요즘 암으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어..' 라는 단정으로 아주 편하고(?) 쉬운 마음으로 그냥 일상을 살았다.
나와 일신학원 동기라고 강조하던 안 원장도 나와 같은 대장암으로 세상을 뜬 사실도 있지만 그건 그의 의사다운 자만과 부주의의 결과라 생각하고..
지금부터라도 나는 부주의 하거나 병을 없수이 여기거나 태만 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며...
공기 좋은 곳으로 집을 옮기고 매일 근처의 산에 갔었고 근처의 산 모퉁이에 텃밭을 꾸미고
수 많은 항암에 대한 책들이나 투병에 대한 책들, 수 없이 빽빽하게 인터넷을 장식하는 모든 정보의 홍수를 차단하고 의사 선생님을 믿고 시키는대로 살았다.
최대한으로 모든 생활과 생각을 단순화 시키며 하루 하루를 감사히 여기며 살았다.
그런 무덤덤하고 지나치게 흔들림 없이 조용하게 사는 나를 친구들은 오히려 이상한 눈과 마음으로 대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사는 내가 답답 했을가??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그래 죽으면 우리 제원이 만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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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위해 궁극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인간 본연의 외로움이다.
인간의 모든 것은 그 처음 시작의 태생적인 외로움과 그리고 마지막 고독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들의 그림자일 뿐이다.
實在하는 모든 것은 단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긴 그림자를 지으며 기억 속에서 연결 되어 질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있다고 보여지는 순간 변하고 찰라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모든 형상들에 대해 無라고 하는 것인 게지...
불교의 '인연과 무'의 사상이 제원이와 나의 관계를 정리한데 큰 힘이 되었다.
그는 그의 業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나는 나의 業으로 그와 모자의 인연이 되었겠지..
짧은 生도 그의 業의 연장선이었고 그를 잃고 가슴에 묻은 나의 외로움과 처참함도 내 業의 연장선인 게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業의 개념을 나는 늘 수용하지 못하나 달리 설명이 되어지지 않는 현실의 사실이 너무 많기에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장의 개념을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로 정리한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罪의 결과물이 아님을 알고는 있으나 그저 미안할 뿐이다.
인연으로 맺어진 육신이 소멸되어지고 없음은 나와의 짧게 정해진 인연을 끊고 그의 業대로 또 다른 인연을 찾았으리라 믿고 끊어 나간다.
결코 기쁘게일 수는 없으나 조용한 마음으로 그를 보내기를 노력한다 지금도..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