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원인 불명으로 무언가 찜찜하고 불안할 때가 있다.
정서의 안정성이 없어지고 공연히 서성거리기도 하고 무언가가 안절부절이다.
딱히 꼬집어 이유가 나타나지 않는 게 더욱 불안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데 이유가 있는 거다 필히..
알아내고 싶지 않다는 잠재의식의 작동일 뿐.
그리고 내 마음대로이고 싶은 욕심이 없어지지 않을 뿐.
그 마음 밑바닥엔 게으름과 함께
떠 오르는 이유를 극복하던지 제거해야 한다는 귀찮음도 있는 거다.
더구나 내 힘으로 안 되는 게 더욱 많음에야..
그래서 누군가는 그냥 대충 넘기며 시간을 떼우다 자기의 그 감정 그 자체를 잊어 먹기도 한다.
어쩜 그것도 한 방편이 되기도 하겠다..순간적이긴 하지만..
남자들이 골치 아플 때 술을 먹고 현실도피(?)를 꾀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을가도 싶다.
그래서 나는 술 취한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감정을 만끽하고 싶어질 때도 그렇고
나쁜 감정을 잊고 싶을 때도 그렇고,
어쨋거나 현실에서 저만큼 벗어나고 싶은 그 마음이 술과 친해지는 거라고 감히 말하면서
나는 그런 비정상적인 벗어남이 싫은 거다.
벗어나지 않고 즐겨야 함이 酒道라 생각하기 때문에..
逸脫이 필요하면 맑은 정신의 행동이라야 자기 발전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고민하고,반성하고,다짐하고, 재충전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건 자신을 찾는 구도의 한 방법이 되겠지만 자기를 벗어나서의 그 무엇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또 엇 길로 빠졌다.
공연히 불안하고 찜찜할 때 나는 조용히 앉아서, 아님 걸으면서 기도를 하는 버릇이 있다.
구도가 아닌 기도..
구도는 반성하고 수양하면고 나를 다듬어 나가면서 바른 길을 찾는 방법이지만
기도란 문자 그대로 비는 것이다.
기도의 바탕은 祈福의 감정이다.
문제는 그 기도의 중심에 항상 내가 있다는 거다.
남편을 위한 기도의 바탕엔 남편이 중심에 있어야 하고
자식을 위한 기도엔 그 중심이 자식이어야 하고
친구를 위한 기도엔 친구가 핵심이어야 함에도 늘 그 중심엔 내가 있다는 거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웃기는 넌센스인지 모른다.
나를 위해서 남편의 일이 잘 되어야 하고
나를 위해서 자식이 잘 되어야 하고
내 기분에 따라 이웃을 위하는 거다.
가장 근본적인 기도의 실체가 없어진 빈 기도란 얘기다.
그런 바람을 기도랍시고 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런 기도의 내용은 이미 내 능력 밖의 일이고
그걸 기도라고 하는 건 이미 정상을 벗어난 나의 욕심인 것을...
오직 상대편의 행복을 위한 바람을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까지 그 어떤 절대의 힘에 의존하는 행위나, 스스로에게 타이르는 염원이나,
자기최면과 흡사한 행위가 기도일진데
늘 내 욕심을 채우는 일에 급급하여 욕심대로의 바램만을 뇌이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기도를 한다고 해도 결국은 그 불안과 찝찝함을 없애지 못하는 거다.
오직 <너>를 위해 무심의 빈 마음으로 기도를 해 보자.
나를 내려 놓고 내가 없어진 빈 공간에서 기도를 해 보자.
오직 <너>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서만 기도해 보자...
그럴려면 우선 <너>를,
그리고 나타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내 욕심 때문에 너 아닌 너를 찾아 나서거나
너의 모습을 내가 만들어 놓은 틀에 집어 넣을려 하지 말고
오직 너를 위해서만 기도해 보자..
나타난 상황을 내 욕심의 잣대로 돌려 보려고 안달하며 불편해 하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일이 무언가를 기도해 보자.
비록 가려진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을지언정 불안하거나 찝찝한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 온전히 흐르는 시간에 맡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부터 새로움이 시작 될 것이다.
순간을,
너만을 위해서....
이렇게 가끔은.....
기도의 힘으로 날아갈 듯이 가벼운 마음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게 초 능력자의 힘인지 내 최면의 효과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 기도의 신비한 영향임은 믿고 있다.